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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모든게 이상했어요"
전세사기 피해자 6명의 이야기를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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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모녀 전세 투기단, 피해자입니다.

40대 자영업자 K씨
전세 계약이 만료됐는데도 전세보증금 2억 원을 되돌려받지 못한지 1년이 다 되어 갑니다. 빌라 방 한 칸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키워오던 제 집 마련의 꿈이 여기서 발목을 잡힐 줄 몰랐습니다. 2018년 8월, 저는 아내와 함께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한 신축 빌라로 이사했습니다. 이것저것 꼼꼼히 따져가며 건축주와 계약했습니다. 다섯번째 전셋집이었습니다. 건물도 깨끗한데다 출퇴근 거리도 짧아 만족스러웠습니다.

친절한 집주인 박 씨

이사하고 2주 정도 지났을 때, 집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새 집주인 박 모 씨는 집을 여러 채 갖고 있는 부자라고 했습니다. 청소대행회사도 따로 운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전세금 떼일 걱정은 없어 보였습니다. 새 집주인 박 씨의 개인 정보가 적혀있고, 도장까지 찍힌 계약서를 받아 기존에 계약했던 분양사무실에서 다시 전세 계약서를 썼습니다. 얼마 뒤 박 씨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감사하다고, 잘 부탁한다는 전화였습니다. 얼굴은 직접 보지 못했지만,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박 씨는 빌라 하자 보수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에 결로가 생겼을 때 집주인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바로 집을 수리해 주었습니다. 저랑 문자메시지로 얘기할 때에는 무슨 말이든 항상 뒤에 별표(☆)를 붙이며 기분 좋게 대해주었습니다. 친절한 박 씨를 의심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더 넓은 집으로 가겠다는 꿈을 키우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회사가 끝나면 피자집 알바도 해가며 15년간 투잡을 뛰었습니다. 전세금 2억 원 중 1억 2천만 원이 대출이었기 때문에, 대출금부터 모두 갚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전셋집에 들어간 뒤에는 하루에 5시간씩만 자면서 일을 하나 더 시작했는데, 큰 돈을 벌어 전세대출도 거의 다 갚았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새 집으로 이사 온 뒤부터 일이 잘 풀렸습니다. 집주인에게 감사의 표시로 밥 한끼 대접하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적어도 이사를 하겠다는 뜻을 밝히기 전까지 집주인 박 씨는 고마운 사람이었습니다.

세 모녀, 갭투자, 89년생

박 씨의 태도가 돌변한건 제가 이사를 하겠다고 연락했을 때부터 였습니다. 계약 만료를 6개월 정도 앞둔 작년 1월,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할 계획을 세우고 박 씨에게 이를 문자메시지로 알렸습니다. 박 씨는 알았다고 하더니 그 뒤로 두 달간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또 다시 문자를 보냈더니, 대뜸 전세금을 1천 만원이나 더 올려서 집을 부동산에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깡통전세니 갭투자니 하는 것들이 이슈가 되고 있는 즈음이었습니다. 기사에 나오는 사례들 속 집주인의 행각이 박 씨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갭투자 관련 기사를 찾아보았습니다. “세 모녀, 갭투자, 박OO, 89년생”이라는 키워드가 눈에 띄었습니다. 집주인 박 씨 자매 명의로 3백여 채의 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은 두 딸 명의로 돼 있지만 세입자와의 계약과 연락은 모친 김 모씨가 대부분 도맡는다고 했습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자료를 보면, 2021년 4월 말 기준 집주인 박 씨 자매는 305채의 주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집주인이 보증금을 제때 되돌려주지 못할 경우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전세보증금반환보증에 가입한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대신 지급한 뒤 집주인에게 청구하는데요. 주택도시보증공사가 박 씨 자매 세입자에게 대신 지급한 돈은 247억 원에 이르고, 주택 168채에 주택도시보증공사의 가압류가 설정돼 있습니다.

“이래라 저래라” 황당한 집주인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을까 걱정 됐습니다. 주변에선 전세보증금반환보증 보험에 들면 보증금은 떼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부랴부랴 보험에 가입하려고 했지만 이미 입주 후 1년이 지나 가입 자격이 안된다고 했습니다. 15년간 어렵게 모아 온 전 재산 2억 원이 날아갈 위기에 처했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박 씨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세금을 1천 만원 올려서 부동산에 집을 내놓았지만, 두 달 동안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이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전세금을 1천 만원이나 올렸으니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부동산중개인은 전세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어 다른 세입자를 구하기는 힘들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한 달 동안 연락이 없던 박 씨는 이번에는 같은 가격에 매매로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자기 집을 세입자에게 이래라 저래라 시키는 집주인의 태도가 너무 황당했습니다. 전세로 내놓아도 나가지 않던 집이 매매로 내놓는다고 해서 나갈 리 만무했습니다.

집주인 박 씨는 어딨나요?

지난해 8월 계약 만기 이후, 9개월 정도가 지난 지금까지 전세보증금 2억 원을 되돌려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를 말리는 고통이 이어졌습니다. 이럴 바에는 그냥 이 집을 내가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 집을 떠안게 되면 16년 동안 품고 있던 아파트 청약의 꿈이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아파트에서 살고 싶다는 꿈이, 이 집 때문에, 그리고 박 씨 때문에 날아간다고 생각하니 너무 억울했습니다.
박 씨는 이제 나몰라라입니다. 법무사를 고용해 전세금반환소송을 진행하게 됐습니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박 씨가 어딨는지 몰라 소송 진행에 애를 먹고 있습니다. 박 씨는 연락도 안됩니다. 주민등록등본상 주소지로 소장을 보내면 ‘폐문부재’, 사람이 그 집에 없다고 반송되고, 또다른 주소를 찾아 다시 보내면 또 반송되는 일들이 지속됐습니다. 신정동의 한 빌라로 서류 상 주소를 변경했다가, 다시 실거주하고 있는 목동의 본인 아파트로 주소를 변경하고, 또 다시 다른 빌라로 주소를 변경하는 꼼수를 사용하면서 박 씨는 도망치고 있습니다.
저는 계속 박 씨를 쫓아가보려 합니다. 그렇게 박 씨를 쫓더라도 제가 15년간 모은 보증금 2억 원을 받을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이달에도 저는 박 씨의 집으로 소장을 보내고, 송달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박 씨를 제재할 법적 장치가 없다는 사실이 저를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제 힘 닿는 데까지 노력해봐야겠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피해자 인터뷰를 토대로 1인칭 시점에서 재구성한 글입니다.
글 김민경 리서처.

집주인은 무혐의, 세입자는 명예훼손?

30대 직장인 B씨
전세보증금 2억 4,900만원. 방 3개에 화장실 2개, 전에 살던 집보다 넓었습니다. 계획했던 예산을 조금 초과했지만 신축 빌라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전세자금 대출도 받고 집을 계약했습니다. 2018년 10월, 저는 서울 강서구 공항동,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이 빌라로 이사했습니다.

“김OO 사장님 임대업 업무가 마비됐다”

전세 계약 만기를 5개월 앞두고 있던 2020년 5월, 문자메시지 한 통이 왔습니다. 발신자는 자신을 집주인 김 모 씨의 대리인이라고 밝혔습니다. 집주인이 코로나19와 정부의 임대사업자 규제 대책으로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걱정되는 세입자는 협의해서 방안을 찾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연락이 닿은 대리인은 7월에 제가 살고 있는 이 집이 경매로 넘어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더니 더 큰 손해를 보기 전에 집을 매수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습니다.
당황스러웠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모은 전재산을 하나도 돌려받지 못하는 건 아닌지, 전세금 대출을 연장하지 못하면 신용불량자가 되는 건 아닌지 온갖 걱정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집주인 대리인은 계속해서 1500만원을 더 내고 이 집을 사라고 했습니다. 시세보다 높았습니다. 제 상황에서 대출을 더 받는 것도 무리였습니다. 결국 세입자인 제가 집을 전세로 내놓기 위해 여러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발로 뛰었습니다. 그러다 부동산으로부터 이 집이 위반건축물이라 거래가 잘 안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온라인 카페를 보니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세입자들이 많았습니다. 알고보니 집주인 김 씨는 70여 채의 집을 소유한 임대사업자였습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자료를 보면, 2021년 4월 말 기준 집주인 김 씨는 71채의 주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집주인이 보증금을 제때 되돌려주지 못할 경우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전세보증금반환보증에 가입한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대신 지급한 뒤 집주인에게 청구하는데요. 주택도시보증공사가 김 씨 세입자에게 대신 지급한 돈은 41억 원에 이릅니다.
2020년 10월, 계약 만기가 다가왔습니다. 걱정했던 경매 처분은 없었습니다. 전세자금 대출은 겨우 연장했습니다. 집주인이 처음부터 전세보증금을 떼먹을 작정이었는지 의심스러웠습니다. 저는 같은 해 12월 집주인 김씨를 전세 사기혐의로 고소했습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다

올해 2월 집주인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전세보증금 반환이 어려운 상황임을 세입자들에게 미리 알리고, 대책을 강구하고자 노력했다”며 “사기의 고의성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게 경찰이 밝힌 무혐의 이유입니다. “전세 계약을 체결할 당시와 현재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변화가 있었고, 위반건축물이라 빌라 매입자나 세입자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집주인의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인 겁니다.
반면 저는 업무방해, 그리고 명예훼손 혐의가 인정되어 사건이 검찰에 송치된 상태입니다.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저랑 빌라를 보러 다니며 전세 계약을 주선했던 사람은 나중에 알고 봤더니 중개인 행세를 한 무자격자였습니다. 전세 계약서에 부동산공인중개사라고 찍은 도장 주인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의 글을 인터넷 카페에 올렸더니 부동산공인중개사가 저를 고소했습니다. 공인중개사는 수수료를 받고 도장을 대신 찍어줬다는데요. 자격이 있는 사람의 직인을 대리로 찍은 것은 문제 삼을 수 없다고 합니다. 부동산공인중개사는 경찰 조사를 받기 전까지 저한테는 계약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했는데 말이 바뀐 겁니다.
저는 이렇게 피해 사실을 호소했다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처벌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은 집주인은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사기 무혐의 처분을 받았는데 말입니다.

물거품이 된 내 집 입주의 꿈

이제는 더 이상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저는 지금 경기도 남양주의 아파트에 살고 있어야 합니다. 5년 전 분양받은 ‘내 집’입니다. 아파트 입주 날짜도 빌라 전세 계약이 끝나는 날로 맞춰놨는데, 소용없는 일이 됐습니다. 이 집 전세 계약이 끝나는 지난해 10월, 전세보증금으로 아파트 잔금을 치르고 내 집에서 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저는 남양주 아파트에 입주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 집에는 지금 다른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전세로 세입자를 들였습니다. 그리고 올해 4월, 제가 살고 있는 빌라에는 강서구청의 압류가 설정됐습니다. 이제는 진짜 이 집이 경매에 넘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저는 계약 기간이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압류된 이 빌라에 발이 묶인 채 오도가도 못하고 있습니다.
피해자 인터뷰를 토대로 1인칭 시점에서 재구성한 글입니다.
글 정다현 리서처.

25살에 전세 사기를 당했습니다

20대 회사원 S씨
전셋집이 제 집이 됐습니다. 계획에 없던 집이었습니다.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한다니 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세보증금 1억4천만 원에 300만 원을 더얹어 이 집을 떠안았습니다. 이렇게 25살에 저는 전세 사기를 당했습니다.

집주인은 “집 많은 사람”

2019년 4월, 강서구 화곡동에 있는 다세대주택을 부모님과 함께 살 전셋집으로 구했습니다. 남들보다 사회에 일찍 나와 5년 동안 모은 돈을 보태드려 뿌듯했습니다. 희망에 들떠 계획도 세웠습니다. 결혼 계획에 맞춰 몇 년 뒤엔 진짜 내 집도 장만할 생각이었습니다.
계약할 때 부동산공인중개사는 집주인 진 모 씨를 “집이 많은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집이 많으면 돈도 많을테니 전세금 떼일 걱정은 없겠거니 싶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수백채를 소유한 임대주택사업자였습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자료를 보면, 2021년 4월 말 기준 집주인 진 씨는 424채의 주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집주인이 보증금을 제때 되돌려주지 못할 경우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전세보증금반환보증 에 가입한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대신 지급한 뒤 집주인에게 청구하는데요. 주택도시보증공사가 진 씨 세입자에게 대신 지급한 돈은 282억 원에 이르고, 주택 418채에 주택도시보증공사의 가압류가 설정돼 있습니다.
건축물대장(위반건축물)
전세계약서
다만 위반건축물이란 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공인중개사는 베란다를 확장해서 위반 딱지가 붙은 것이라며, 전세세입자는 위반건축물로 인한 이행강제금을 내지 않으니 피해 입을 일이 전혀 없다고 안심시켰습니다. 위반건축물이라 전세 대출이 어렵지만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을 통해서는 5천만 원을 대출받을 수 있다면서 대출브로커까지 알선해줬습니다. 그 말을 믿고 보증금 1억4천만 원에 전세를 계약했습니다. 전입신고도 하고, 확정일자도 받았습니다. 등기부등본도 꼼꼼히 확인했습니다.

네이버에 그 이름 '진OO'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에서 깡통전세니, 갭투기니 하는 얘기가 들려왔습니다. 강서구청에서 갭투기 피해를 주의하라는 내용의 안내문까지 날아왔습니다. ‘설마, 우리집은 괜찮겠지’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네이버에 집주인 이름 '진OO'을 검색했습니다. 진OO 갭투기, 진OO 전세 사기. 눈 앞을 가득 메운 것은 집주인 이름이었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기사와 전세사기 블로그, 카페 글을 클릭했습니다. 피해 사례를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집은 아니겠지라는 기대가 사라졌습니다.
계약 기간이 1년 반이나 남았지만, 만기 때 전세보증금을 되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커졌습니다.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전세사기모임 온라인 카페에 가입했습니다. 집주인과는 연락이 안된다고 했습니다. 카페에서 번호를 찾아내 집주인 대리인이라는 사람에게 전화했습니다. “이렇게 됐으니까 빨리 매입하시는게 좋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어처구니 없었습니다.

제발 깎아달라고 사정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집을 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들 경매로 넘어가면 과정도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고 했습니다. 일도 바쁜데 집 문제까지 신경 쓸 여력도 없었습니다. 결국 집을 사겠다고 마음먹고 집주인 대리인에게 연락했습니다. 대리인은 집값으로 1억5천만원을 불렀습니다.
진OO 대리인 문자1
진OO 대리인 문자2
등기부등본
내가 피해자인데, 1천만원을 더 달라니. 원치 않는 집을 떠안게 된 것만으로도 기가 찰 노릇인데 돈을 더 얹어줄 수는 없었습니다. 대리인은 1억4,500만 원으로 집값을 낮춰 불렀습니다. “지금 집주인 진 씨에게 압류 걸린 집이 11채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도 언제 압류가 들어올지 모르니 빨리 매매해야한다”라고 문자를 보내오며 집을 사라고 재촉했습니다. 대리인에게 200만 원만 깎아달라고 재차 사정했습니다. 결국 1억4,300만 원에 집을 샀습니다. 2019년 10월 30일, 6개월 전만해도 세입자였던 저는 집주인이 됐습니다. 전세보증금에 300만원을 더얹어 위반건축물을 떠안았습니다.

전세 사기는 구조적 문제

처음에는 집주인 진 씨와 공인중개사를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세 사기 피해가 속출하는데도 예방 대책이나 피해 구제책을 마련하지 않는 정부에 화가 났습니다. 국회를 찾아가면 나을까 싶어 지역구 의원 사무실을 찾았지만 노력하겠다는 답변만 들었습니다. 다른 의원 사무실에선 기운 내라는 위로의 말만 건넸습니다.
의원문의
의원답변
서울시민원
서울시민원답변
저처럼 위반건축물을 어쩔 수 없이 떠안은 세입자들을 구제해달라는 민원을 서울시청에 넣었을 때는 관련 대책은 현재 계획에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이미 피해가 발생했는데, 피해를 예방하려면 정부24사이트에서 꼼꼼히 정보를 확인하라는 답변이 덧붙었습니다.

“제가 사라고 한 건 아니잖아요”

현재 이 집에서 산지 2년이 다 되어갑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사 갈 준비를 했겠죠. 나쁜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어 지난 달 이 집을 팔려고 내놨습니다. 처음에 전세계약을 했던 부동산을 찾아갔더니 “위반건축물이라 대출이 안되는 집을 누가 사요, 당연히 시간이 오래 걸리죠”라고 답했습니다. 무책임한 태도에 화가 나 따졌더니 “고객님이 사신 거지 제가 사라고 한거 아니잖아요”라며 저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최근에는 남자 친구의 전셋집을 알아보러 빌라촌을 다닙니다. 신축 오피스텔 1.5룸 8평형 전셋값이 매매가와 비슷한 2억2천만 원이라고 하질 않나, 비싸다고 하니 전세금 지원이라는 게 있어서 몇 백만원을 깎아줄 수 있다고 하질 않나, 이해하기 어려운 조건들을 제시하는 게 2년 전 제가 당했던 전세 사기와 비슷해 보였습니다. 새로운 희생양을 찾고 있는 겁니다.
아파트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서민들이 차선으로 세들어 사는 빌라가 갭투기의 표적이 되고, 없는 사람들만 계속해서 피해를 보는 이 시스템은 너무 잘못됐습니다. 세입자가 알아서 전세금을 지켜야 한다면, 반복되는 전세 사기의 사슬을 끊을 수 없습니다.
“도와달라”는 민원을 넣어도 제대로된 답변은 없습니다. 정부와 지자체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하루하루 지쳐가지만, 이것 말고는 달리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저는 오늘도 민원을 넣습니다.
피해자 인터뷰를 토대로 1인칭 시점에서 재구성한 글입니다.
글 이승주 리서처.

뻔뻔한 집주인, 무능한 정부

30대 공시생 J씨
5년간 다녔던 직장에서 모은 소중한 돈, 1억 5천만 원을 가지고 펼쳤던 첫 독립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저는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한 빌라에 살고 있는 전세 사기 피해자입니다. 잘 알려진 부동산 앱을 통해서 거래했고, 입주하면서 확정일자까지 받아놓았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안 괜찮은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위험을 미리 생각해 보지 못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축이라 건축주와 직접 전세 계약을 했습니다. 한 달 뒤 건축주는 집주인이 바뀐다고 전하더군요. 김 모씨라고 했습니다. 제 집 뿐만 아니라 빌라 전부를 사들였다고 했습니다. ‘돈이 많은 분이구나’ 여겼을 뿐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수험생이라 시험 말고는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집주인 김 씨는 2021년 현재 800채 넘는 집을 소유한 임대사업자였습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자료를 보면, 2021년 4월 말 기준 집주인 김 씨는 817채의 주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집주인이 보증금을 제때 되돌려주지 못할 경우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전세보증금반환보증에 가입한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대신 지급한 뒤 집주인에게 청구하는데요. 주택도시보증공사가 김 씨 세입자에게 대신 지급한 돈은 165억 원에 이르고, 주택 697채에 주택도시보증공사의 가압류가 설정돼 있습니다.

경매로 넘어갔는데, 괜찮다는 관리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건 2020년 7월, 전세 계약 만료를 3개월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윗집에 사시는 분께서 본인의 집이 경매에 부쳐졌다며 ‘세입자 단톡방’에 경매 관련 파일을 올리셨습니다. 확인해보니 이 빌라에서 3채가 경매 진행 중이었습니다. 다들 당황했습니다. 단톡방에 들어와 있던 빌라 관리자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습니다.
관리자는 “전혀 문제될 게 없다”고 답했습니다. 관리자는 집주인 김 씨가 운영하는 빌라 관리회사 직원이었습니다. “경매로 넘어간 게 어떻게 괜찮은 거냐”며 세입자들이 계속 따지자, 관리자는 오히려 이들을 단톡방에서 ‘강퇴’시켰습니다. 불안하긴 했지만 일단 제가 살고 있는 집의 부동산등기부등본은 경매나 압류 내역 없이 깨끗했습니다. 따로 저당 잡힌 내역도 없었습니다. 우선은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시험 2주 전 악몽이 시작되다

그 즈음이었습니다. 재계약을 할까도 잠깐 고민했지만, 계약을 주선했던 부동산중개인이 “전세보증금을 700만원 올리겠다”는 집주인의 말을 전해왔습니다. 만료일까지 3개월이나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원래 다들 그렇게 한다며 보증금 인상분을 빨리 입금해달라는 중개인의 말에 이사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이사를 하겠다고 전화를 했더니, 저보고 매물을 알아서 부동산중개업소에 내놓으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본인들도 내놓겠다고 하길래 어디에 내놓았냐고 물었지만, 자기네들이 올리는 곳이 따로 있다는 말만 할 뿐,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인 건 분명했지만, 그 당시의 저에겐 눈앞에 닥친 얼마 뒤의 시험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시험이 2주 앞으로 다가왔던 어느 날, 저희 빌라 앞에 취재를 온 MBC의 한 기자와 마주쳤습니다. 그분을 통해 저희 집 또한 다른 집들처럼 가압류가 걸려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깨끗했던 등기에 갑자기 “가압류”라는 글자 석 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금액은 100억 원에 이르렀습니다.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온통 시험 걱정으로 꽉 찼던 제 머릿속이 ‘전세보증금’에 대한 걱정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습니다.
몇 개월 전부터 줄곧 느끼고 있던 막연한 불안이 현실이 되자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밥은 먹는 족족 체하기 일쑤였습니다. 잠도 거의 못 자고, 소화 불량으로 힘들어하는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공부에 집중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처참한 마음으로 시험을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험이 끝난 뒤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소송에 이겨도 보증금은 여전히 집주인 손에

시험이 끝나고 이것저것 알아보았지만, 딱히 보증금을 돌려받을 방법은 없었습니다. 관리인에게 따지자 본인은 빌라 관리만 해줄 뿐 그런 쪽 관련해서는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는다며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때마침 MBC PD수첩이 집주인 김 씨의 임대사업 행태를 집중 보도했습니다. 집주인 김 씨가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해 사고난 금액이 1백억 원이 넘는다는 겁니다. 가압류된 집만 해도 200채가 넘었습니다.
그나마 연락이 닿던 관리인, 그리고 집주인이 운영하는 빌라관리업체 다른 직원들마저 전화를 받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뭐라도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 끝에, 피해자들이 모인 단톡방에 들어갔습니다. 이미 피해자가 300명이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전세보증금 반환 소송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소송에서는 이겼지만, 아직까지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송 승소 여부와 전세금 반환 여부는 따로였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집은 이미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또다른 세입자가 경매를 신청했습니다. 저희 집과 같은 층에 있는 집도 경매로 넘어갔는데, 감정가 1억 7천만 원에서 매번 유찰돼 최저가격인 7천만 원까지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경매를 한다고 해도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이런 집을 낙찰받으려고 할까요?

나쁜 임대인을 제재할 수 없나요?

왜 그때 좀 더 꼼꼼히 알아보지 못했는지 후회됩니다. 전세 계약을 하기 전 “전세가율이 높은 편이니 전세보증금반환보증 보험에 드는 게 어떻겠냐”는 친구의 말을 들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집주인 김 씨는 이미 주택도시보증공사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보험 가입이 거절된다는 사실도 곧 알게 됐습니다.
단톡방에 모인 피해자 분들 가운데에는 저보다도 사정이 딱한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인데도 정부가 나쁜 임대인을 제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하나 마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무능했거나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겁니다.
집주인은 전세보증금을 되돌려줄 생각이었지만, 주택도시보증공사가 가압류를 걸어서 반환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전세금을 제때 돌려줬더라면 가압류는 없었을 겁니다. 궤변입니다. 집주인의 뻔뻔한 태도가 저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피해자 인터뷰를 토대로 1인칭 시점에서 재구성한 글입니다.
글 김민경 리서처.

돌이켜보니 모든 게 이상했습니다

20대 회사원 P씨
처음 이 집을 본 건 작년 4월이었습니다. 경기도 안성으로 급히 이사를 해야 하는데, 살고 있던 집 계약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아 마음이 급했습니다. 유명 부동산 앱을 살피다 찾게 된 이 집은 신축빌라였고, 투룸이었습니다. 전세보증금도 6,000만 원으로 다른 매물에 비해 저렴했습니다.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계약을 결심했습니다.

마다할 이유가 없던 좋은 조건

부동산인 줄 알고 찾아간 곳은 가정집을 개조한 사무실이었습니다. 집주인의 위임을 받았다는 분과 계약을 진행했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팀장이라고 소개하며 “합법적인 절차로 위임받은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저를 거듭 안심시켰습니다. 수수료가 얼마냐 물으니 이 계약은 수수료도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좋은 조건의 집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집주인 김 모씨도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팀장이라던 그 사람은 제게 집주인 김 씨가 임대사업자인데 집을 500채 정도 가지고 있다고 귀띔했습니다. 빚은 조금 있다면서, 그 많은 집을 전부 현금으로 구매하긴 어렵지 않겠느냐고, 임대사업하는 사람들은 다 그 정도 빚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주택임대사업을 하는 사람 얘기는 처음이라서 그저 신기했습니다. 집이 500채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돈이 정말 많구나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2020년 4월, 임대차 계약을 맺었습니다. 월세살이 끝에 처음으로 계약한 전셋집이었습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자료를 보면, 2021년 4월 말 기준 집주인 김 씨는 147채의 주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집주인이 보증금을 제때 되돌려주지 못할 경우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전세보증금반환보증에 가입한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대신 지급한 뒤 집주인에게 청구하는데요. 주택도시보증공사가 김 씨 세입자에게 대신 지급한 돈은 37억 원에 이릅니다.

얼굴 없는 집주인, 그의 실체는...

전세계약을 할 때 확정일자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어른들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했기에 알고 있었습니다. 전입신고를 하고 확정일자를 받았습니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전세보증금 반환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 자신했습니다. 전세금반환보증 보험은 최근에서야 알게 돼 가입하지 못했습니다.
집주인과도 몇 번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한번은 집 현관에 전기요금 미납 고지서가 붙어 있길래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집주인은 본인도 몰랐다며 금새 미납된 요금을 납부했습니다. 목소리는 굉장히 진중했습니다. 하자가 있을 때에도 보수는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대부분의 일을 다른 사람을 통해 처리한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악덕 집주인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국세 체납으로 압류 예정”

집주인 김 씨에게 받은 압류 예정 통보 문자
집주인 김 씨와 주고받은 문자 내용
그렇게 열 달이 지난 2021년 2월 19일, 청천벽력같은 문자를 받았습니다. “국세 체납으로 (임대인의 재산 또는 해당 임대주택이) 압류 예정이니 담당자와 통화를 바랍니다.” 집주인이 보낸 문자였습니다. 처음에는 얼떨떨했습니다. 압류라면 이 집이 경매에 넘어간다는 건가? 난생 처음 겪어보는 상황이라 온갖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집주인은 담당자라는 사람을 소개하며 거기에다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부동산등기부등본 갑구 순위번호 5
담당자라는 사람은 한 부동산컨설팅회사의 직원이었습니다. 그 직원은 6월이 되면 두 배로 과세가 되니 그 전에 신속하게 매매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이 집이 팔리면 매매대금으로 보증금을 반환해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2022년 4월까지 계약을 한 집에서 벌써 이사를 준비해야 한다는 게 당황스러웠지만, 전세보증금은 되돌려받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집주인과는 더이상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진행 상황을 알고 싶다, 전세 계약 해지를 원한다고 문자를 보냈지만 답이 없었습니다. 전화를 하면 담당자와 이야기하라는 문자만이 날아왔습니다.

‘무효’한 임대차 계약

집주인이 입을 다무니 도리가 없었습니다. 전셋집 부동산등기부등본에 계약할 때 눈여겨보지 않았던 신탁사가 있길래 전화를 걸어봤습니다. 신탁사 직원은 집주인 김 씨와 계약 관계에 있는 건 맞지만 이 집에 세입자가 사는 건 처음 알았다고 했습니다. 세입자를 들이려면 신탁사로부터 임대차 승낙서를 발급받아야 하고, 그래야 계약이 유효한데, 집주인이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 임대차 계약은 무효한 계약이 됐고, 저는 집이 매매되거나 경매에 넘어가도 우선순위에서 밀려 전세보증금을 못 돌려받을 처지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황당한 이야기를 담당자라던 부동산컨설팅회사 직원에게 전했더니 이제 본인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변호사도 찾아 가 봤습니다. 전형적인 사기이지만,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답했습니다. 주변에 경매하는 분들을 찾아가 여쭤봤습니다. 짜고 치는 사기에 당한 것 같다며 안타까워할 뿐이었습니다.

그때 더 의심했어야 했습니다.

전세보증금 6천만 원은 지금까지 제가 모은 3천만 원에 마이너스 통장 3천만원을 보태 마련한 돈입니다. 그 돈을 돌려받을 수 없다 생각하니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이 일을 겪기 전, 뉴스에 나오는 전세 사기 사건을 보며 저 세입자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때만 해도 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돌이켜보니 미심쩍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통상적인 계약과는 분명 달랐습니다. 계약 장소가 부동산이 아니었던 것도, 집주인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팀장이라는 사람을 통해 모든 것을 처리한 것도, 심지어 수수료를 받지 않은 것도, 그때 더 의심했어야 했습니다.
피해자 인터뷰를 토대로 1인칭 시점에서 재구성한 글입니다.
글 구나연 리서처.

126억 원 압류가 걸린 빌라, 제 신혼집입니다

30대 회사원 J씨
저는 신혼살림을 거액이 압류된 집에 차렸습니다. 압류 금액은 12,639,000,000원, 1백억 원이 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새 출발을 이런 집에서 하긴 싫었습니다. 하지만 전세 계약 기간이 끝난 지 1년이 넘은 지금도 전세보증금 1억6천만 원을 돌려받지 못해 발이 묶여 있습니다. 이 집 주인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집부자’ 이 모 씨입니다. 이 씨는 4백 채가 넘는 주택을 소유하며 임대사업을 벌여왔습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자료를 보면, 2021년 4월 말 기준 집주인 이 씨는 392채의 주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집주인이 보증금을 제때 되돌려주지 못할 경우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전세보증금반환보증에 가입한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대신 지급한 뒤 집주인에게 청구하는데요. 주택도시보증공사가 이 씨 세입자에게 대신 지급한 돈은 569억 원에 이르고, 주택 391채에 주택도시보증공사의 가압류가 설정돼 있습니다.
집주인 이 씨에게 받은 문자메시지
처음 피해 사실을 알게 된 건 결혼을 두 달 앞둔 2020년 1월이었습니다. 계약 만기를 3개월 앞두고 좀 더 큰 집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싶어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집주인이 대뜸 “주인이 바뀐 게 언제인데 나에게 전화하냐”는 황당한 소리를 하더군요. 부동산중개인을 통해 수소문한 끝에 새 집주인 연락처를 알게 됐습니다. 바로 집부자 이 씨였습니다. 길게 통화하기 어렵다며 문자를 보내겠다고 했고, 몇 분 후 장문의 안내문이 왔습니다. “보증금을 돌려줄 여력이 되지 않으니 집을 매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날벼락이었습니다.
이런 처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유명 부동산 앱을 통해 만난 부동산중개인이 이 집을 소개했는데, 신축 빌라라 깨끗한 건 물론이고 에어컨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마음에 들었습니다. 노파심에 열 군데가 넘는 부동산을 더 들렀는데, 다섯 군데 정도가 이 집을 추천해 더욱 믿음이 갔습니다.

바뀐 집주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중개인은 빌라가 미분양 상태이니 시공사와 먼저 계약하고, 집이 팔리면 그때 바뀐 집주인을 안내하겠다고 했습니다. 계약 내용은 승계되니 걱정할 것 없다고 안심시켰습니다. 그때 더 의심해야 했습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이 씨는 신축 직후인 2018년 1월, 이 빌라를 매수했습니다. 2018년 4월 전세 계약 당시에도 이미 이 집의 주인이었는데, 제 계약이 끝난 후 부동산등기부등본에 이름을 올린 겁니다.
저는 집주인이 바뀐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습니다. 매달 나오는 수도요금 청구서에는 지금도 옛 집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새 집주인도, 옛 집주인도, 부동산중개인도, 누구도 제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세입자인 저는 사전에 매매 과정을 알 방법도, 안다고 한들 거부할 권리도 없다고 합니다.

인생 첫 전세 계약, 조심 또 조심했는데...

고시원에서 3년간 월세 생활을 하다가 알아본 첫 전세였습니다. 1억 원이 넘는 큰 계약이라 조심, 또 조심했습니다. 전입신고를 하고 확정일자를 받았습니다. 부동산등기부등본도 꼼꼼히 확인했습니다. 깨끗했습니다.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 근저당권이 설정된 것도, 압류나 가압류도 없었습니다.
보험도 들었습니다. 은행에서 1억1천만 원 전세자금 대출을 받으면서 주택금융공사의 전세보증 보험에 가입했습니다. 전세보증금을 지키기 위해 세입자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으니 문제 될 건 없으리라 확신했습니다. 어리석었습니다. 제가 든 전세 보험은 세입자가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도록 주택금융공사가 보증을 서주는 보험이었습니다. 전세금 반환을 보장하는 보험은 ‘전세보증 보험’이 아니라 ‘반환보증 보험’이었습니다. 저처럼 두 상품을 헷갈려 잘못 가입한 세입자들이 많다는 건 최근에서야 알았습니다. 세입자에게 정확한 정책 정보를 전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금융당국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하지만, 사후약방문이겠죠.
전세자금 대출을 간신히 연장해 신용불량자 신세는 면했습니다. 집주인에게 화를 내다가, 이내 애원했습니다. 다음 달에 결혼도 해야 하고, 당장 그 돈 없이는 인생이 무너진다고, 제발 내 돈 돌려달라고 매달렸습니다. 나도 부동산에 집을 내놓고 발품을 팔 테니 방법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결혼 후 첫 겨울은 너무도 추웠습니다

결국 2020년 3월로 예정돼 있던 결혼을 미뤘습니다. 같은 해 4월, 계약 만기일자가 지났고 7월에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이 집에 1백억 원이 넘는 가압류를 걸었습니다. 전세금반환보증 보험에 가입한 피해 세입자들의 전세보증금을 주택도시보증공사가 대신 내주고, 집주인에게 돈을 받고자 제가 살고 있는 집에 가압류를 설정한 겁니다. 가압류 한 달 뒤인 8월,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렇게 이 빌라에 신혼살림을 차렸습니다. 언제쯤 이 집을 나갈 수 있을까요? 제 돈은 언제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이 빌라에서 첫 겨울을 났습니다. 올해 1월, 동파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집주인과 연락이 닿을 리 만무했습니다. 사비로 동파업체를 불러 수리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부인과 일주일간 모텔을 전전했습니다. 그러다 묘수가 생각났습니다. 앞집 수도 배관을 우리 집으로 끌어다 쓰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앞집 집주인도 ‘집부자’ 이 씨였습니다. 빈집이었습니다. 이전 세입자는 전세금반환보증 보험에 가입한 덕분에 전세금을 돌려받고 나갔지만, 압류가 걸려 있어 새로운 세입자를 들일 수도 없었던 겁니다.

그는 ‘단기방’으로 지금도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런데 2월 중순, 앞집에 이사왔다는 세입자가 저희 집을 찾아와 “수도 배관을 끌어다 쓰면 어떡하냐”고 항의했습니다. 의아했습니다. 압류가 걸린 집인데 이 씨는 어떻게 세를 놓았을까요. 앞집 세입자는 두세 달 정도 살기 위해 무보증 월세로 들어왔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른바 ‘단기방’ 세입자였습니다.
저는 전 재산과 다름없는 1억6천만 원을 돌려받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동안 집주인 이 씨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단기방 모집책을 내세워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모집책은 이 씨가 얼마나 나쁜 임대인인지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습니다. 모집책은 피해 세입자들의 이야기와 피해 규모를 듣고 나서는 이 씨가 압류를 피해 차명금융계좌까지 동원하고 있다고 털어놨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주택도시보증공사는 가압류만 해놓고 현장 점검은 하지 않는 걸까요?

계속 싸우겠습니다

이 씨의 탈세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직접 모아 국세청에 제보했습니다. 아직 별다른 답이 없습니다. 서울시 38세금징수과도 찾았습니다. 증거자료는 제가 줬는데, 자신들이 열심히 추적해서 집부자 이 씨의 세금을 추징했다는 기사가 얼마 뒤 났습니다. 피해 세입자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대하는 행정기관이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집부자 이씨가 단기방을 운영하지 못하도록 빨간 경고장도 만들었습니다. 피해 세입자 2백여 명에게 나눠주고, 이 씨 소유 빈집에 붙이자고 했습니다. 사는 게 빠듯해서인지 많은 분이 함께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가만히 앉아 자신의 호주머니를 채우고 있을 이 씨를 생각하면, 저는 계속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 싸울 겁니다.
피해자 인터뷰를 토대로 1인칭 시점에서 재구성한 글입니다.
글 구나연 리서처.
👑 ‘빌라왕국' 빌라왕 김OO 🗺 ‘빌라왕국' 지도
📈 김OO 피해자 설문조사
💵 "대박을 꿈꿨습니다" ☠️ 반성하지 않는 ‘빌라왕’들
🙅🏼‍♂️ ‘나쁜 집주인' 방지하려면 (06.14.)
🤔 "돌이켜 보면 모든게 이상했어요"
기획: MBC기획취재팀
시각화/디자인: 이준원, 최훈철, 오혜윤
리서처: 김민경, 정다현, 구나연, 이승주, 박수연, 임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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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획물은 한국언론학회-SNU팩트체크센터의 지원을 받았습니다.